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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너무 발췌를 많이해서 저작권 안걸리나 "불안"하다;;;

 

<지위로 인한 불안>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걱정.

이런 걱정은 매우 독성이 강해 생활의 광범위한 영역의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

 

불안은 무엇보다도 불황, 실업, 승진, 퇴직, 업계 동료나 나누는 대화, 성공을 거둔 걸출한 친구에 관한 신문기사 등으로 유발된다. 질토(불안도 이 감정과 관련이 있다)를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안을 드러내는 것 역시 사회적으로 경솔한 행동이며, 따라서 이 내적인 드라마의 증거는 흔치 않다. 보통 어디에 몰두한 듯한 눈길, 부설질 것 같은 미소, 다른 사람의 성공 소식을 들은 뒤이어진느 유난히 긴 침묵 등으로만 간간이 나타날 뿐이다.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사람들(소크라테스나 예수)은 다르겠지만, 세상이 자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면 스스로도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더욱 아타까운 것은 높은 지위를 얻기가 어려우며, 그것을 평생에 걸쳐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점이다. 어디서 어던 피를 가지고 태어나느냐에 따라 지위가 날 때부터 고정되는 사회가 아니라면, 지위는 우리의 성취에 달려 있다. 우리는 어리석거나 자기 자신을 잘 몰라 실패할 수도 있고, 거시 경제나 다른 사람들의 적의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다.

 

실패에서 굴욕감이 생긴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우리의 가치를 납득시키지 못했고, 따라서 성공한 사람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뿌끄러워할 처지에 놓였다는 괴로운 인식에서 나온다.

 

 

<사랑결핍>

 

불편은 모욕을 동반하지만 않으면 오랜기간이라도 불평없이 견딜 수 있다. 병사나 탐험가들이 그런 예이다.

그들은 사회의 극빈층이 겪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궁핌을 기꺼이 견디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버텨낸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 부터 자신의 가치에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속물근성>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솔로몬의 지혜가 있고 오디세우스의 책략과 꾀가 있다 해도, 우리의 자질을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표지도 제시하지 못한다면, 우리 존재는 그들에게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의한 전대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기대>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파는 사라지지 않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중세 유럽에서 변덕스러운 땅을 경작하던 조상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가능성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자신이 모자란 존재이고 자신의 소유도 충분치 못하다는 느낌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박탈감. 불평등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 우리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난다.

 

인간은 신 앞에서는 평등할지 몰라도, 이것이 현실에서 평등을 추구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출생과 운에 따른 모든 특권을 폐지 했을 때, 모든 사람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누릴 때, 야망이 큰 사람은 위대한 일을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자신이 비범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을 통해 금세 교정되고 마는 망상이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부루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것이 대체로 평등해 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초라한 배경에서 태어났지만 큰 부를 일군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예외가 규칙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의 삶이 기대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두가지 방법

하나는 더 많은 성췰르 거두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능력주의>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 내에는 본래부터 착취의 역학이 자리잡고 있었다. 모든 고용주는 노동자의 생산물을 팔아 얻는 돈보다 싼 값으로 노동자를 고용하며, 그 차액을 "이윤"으로 자기 호주머니에 챙기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언론에서는 이런 이윤을 고용주의 "모험"과 "경영"에 대한 보답이라고 찬양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일이 도둑질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다고 생각했다.

 

<불확실성>

1. 변덕스러운 재능 - 뮤즈

2. 운 - 운은 없다

3. 고용주

4. 고용주의 이익

5. 세계경제

 

다른 무엇 보다도 일을 기준으로 남들이 우리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질문에 우리가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우리를 대접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맨 처음에 대답해야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해법

 

철학

지적인 양심

 

다른사람의 태도                                   자기의 이미지

 

너는 불명예스럽다 - 이성 -  참일 경우 - 나는 불명예스럽다

                                       거짓일 경우 - 나는 나에 대한 이미지와 관계없이 괜찮은 사람이다.

 

칭찬을 받으면 더 나아지는가?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진다더냐? 금, 상아, 자은 꽃 한 송이는 어떤가?

마르쿠스는 칭잔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파악하라고 권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데미아 윤리학에서 인간 행동은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보통 극단으로 흐르는 오류를 범한다고 예를 들어 설명한 뒤, 지혜로우면서도 침착한 중도를 이상으로 제시하면서, 이성의 도움을 받아 중도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은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에게 중요하다. 물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공동체로부터 무시당할 경우 신체적으로 불편하다고 위험할 수 있다. 심리적인 면에서 보자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을 경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유지할 수 없다.

철학적인 접근 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반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예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효과적인 비극의 핵심요소를 규정하려고 했다. 우선 한 사람의 중심인물이 있어야 하고, 줄거리가 비교적 압축된 시간에 전개되어야 하며, 당연한 일이지만 "주인공의 운의 변화"가 "비참한 상태에서 행복한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행복한 상태에서 비참한 상태로 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눈에 더 두드러지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비극의 주인공은 윤리적 수준에서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자질과 더불어 어떤 약점, 예를 들어 지나친 자만심이나 격한 기질이나 충동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인물은 동기가 악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 즉 판단의 잘못이라고 부른것, 또는 일시적인 맹목, 또는 현실적이거나 감정적인 과실 때문에 엄청난 실수를 ㄹ저지른다. 여기서 가장 끔칙한 페리페테이아, 즉 운의 역전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귀중하게 여기던 것을 모두 잃고 거의 언제나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내놓는다.

 

우리가 비극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평소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작품을 통해 실패의 유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 많이 아는 것은 곧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비극 작품은 아주 작은 단계들, 종종 아무 뜻도 없어 보이는 단계들을 통하여 교묘하게 주인공의 성공을 몰락과 연결시켜 나간다.

 

정치

 

능력주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적 성취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거둔 것이라고 이해한다.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일단 주요한 미덕이 적어도 네 가지는 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 네 가지란 창의성, 용기, 지능, 체력이다. 다른 미덕, 예컨대 겸손이나 경건은 이제 눈길을 끌지 못한다. 성취는 이제 과거 사회에서처럼 행운이나 섭리나 신 대문이라고 이야기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득이 생존에는 모자라지 않는다 해도 공동체의 소득에 비해 현저하게 뒤처지면 언제나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그럴 경우 그들은 공동체가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최소한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가질 수 없으며, 품위가 없다는 공동체의 심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근대의 성공적 삶이라는 이상은 돈과 선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또 하나의 결결도 시도 한다. 즉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세 가지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첫째는 무엇이 우리를 행봅ㄱ하게 하는지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몸이 보통 알고 있어 염분이 필요하면 훈제 생선으로 향하고 혈당이 낮으면 복숭아로 향하듯이, 전시도 번영을 위해서는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 잘 알고 있어 우리를 어떤 일이나 기획으로 자연스럽게 몰고 간다는 것이다. 둘때로 근대 문명에서 접할 수 있는 엄정나게 다양한 직업과 소비재가 우리의 행복과 별 관계없이 욕방만 부추기는 번지르르한 소모적 전시품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요구 몇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쓸 수 있는 돈이 많을수록 제품과 용역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행복해질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새로 산 자동차는 우리가 이미 ㅅ유한 모든 경이로운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곧 우리 생활의 물질적 배경 속으로 사라져, 특별히 눈길을 주게 되는 일은 거의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강도가 창문을 깨고 라디오를 훔쳐가는 역설적인 봉사를 해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깨달을 것이다.

 

기독교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대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는 책은 세계의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실제로 도는 예술작품을 통하여- 것이 수도 있다.

 

사람들은 천국과 지상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이런 식으로 차이를보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성공에 대한 억압적인 일차원적 비전에서 벗어날 수 잇ㄷ. 기독교는 위계의 개념을 없앤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윤리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신으로 재규정 했다. 가난이 선과 공존할 수 있고, 초라한 직업이 고귀한 영혼과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보헤미아

물질을 소유하는 것과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연결시키는 사회적 태도를 뒤집고자 이렇게 덧붙인다."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전통과 결별하자는 위고와 에머슨의 외침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1850년 제라르 드 네르발은 애완동물에 대한 기존 관념에 순응하지 않고, 파란리본에 가재를 묶어 뤽상부르 공원을 돌아다녔다. 드 네르발은 물었다. "왜 개는 괜찮은데 가재는 우스꽝스러운가? 또 다른 침ㅇ승을 골라 산책을 시킨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나는 가재를 좋아한다. 가재는 평화롭고 진지한 동물이다. 가재는 바다의 비밀을 알고, 짖지 않고, 개처럼 사람의 단자적 사생활을 갉아 먹지 않는다. 괴테는 개를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괴테가 미쳤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오나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실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야침을 품고, 어떤 결과들을 선호하고,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밖에 없는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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